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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약속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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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약속

애를 쓰지 않았는데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 있지만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춘 채 생각나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도 있습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기억 할 수 있다는 것도
잊힐 수 있다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1972년 12월 말 즈음
날짜로는 기억되지 않는 어느 날
제주도 산방산 남쪽 바다에는 겨울바람 때문에 성난 파도가
하얀 머리카락을 날리며 기세등등하게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산방산을 금방이라도 삼킬 기세로, 사위지 않을 의지를 드러내며
용머리해안을 탐하고 있었습니다.

스무살 청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린
그 겨울의 바람, 해안을 향해 질주해왔던 산 같았던 파도의 행렬.....은
저를 제주도와 연결해 주고 있는 두 개의 고리입니다.
그 후로도 제주를 여러 번 다녀왔지만
한라산 정상에 오르고자 제주에 간 것은 세 번 뿐입니다.
산을 좋아하지만 미치도록 좋아하지는 않은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2000년 11월 17일 초면의 백록담은 수줍어서인지
눈보라 속으로 숨어 버렸었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안고 15년을 보냈습니다.
2015년 10월 23일, 추첨 된 다섯 명, 지명 받은 두 명의 동료 그리고 나
8명은 1박 2일 일정으로 백록담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쫒기는 시간일정, 무리한 식사, 무릎의 통증으로 정상을 수 백여 미터 남겨둔
수목한계선 부근에서 하산하여야 했습니다.

그 일로부터 3주가 지난 11월 14일
동료 3인과 함께 한라산 백록담을 다시 올랐습니다. 생애 두 번째로..
산을 산으로 대하는 마음으로 짠 일정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높이가 높든 또는 낮든 정상에 서면 감동을 누리게 됩니다.
이번 등정에 새로운 감동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약속을 이루어낸 연고일 것입니다.

수목한계선 위 정상에 핀 단풍의 행렬, 단풍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행렬
그 줄 맨 앞에는 ‘백록담’이라 적힌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표지석이 제게 가만히 말을 걸어왔습니다.
“줄을 서시오.” 저는 그 날 줄을 서지 않았습니다.
(2015. 11.14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