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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정리하는 이유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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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정리하며

‘산이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른다.’ 말합니다.
산이 있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것입니다.
때론 별 생각 없이 산을 오른다는 말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하냐? 는 항변 같은 느낌도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산을 다시 오르지 않기 위해 산을 오릅니다.
스스로에게 ‘산을 정리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 산을 다시 오르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여기서 만족하자.’는 자족의 위로가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정리한 산이 더러 있습니다.
백두산, 한라산, 성인봉, 지리산, 태백산, 무등산 등이 거기에 속합니다.
여기에 설악산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공룡능선이라는 미완의 과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행의지를 마음에 심어놓은 것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능선입구에서 발을 돌려 하산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의욕이 체력을 앞섰다는 우려의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공룡능선 만을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소공원 매표소를 지나 희운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시각인 정오 한시 이십분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비 개인 후 낮게 드리운 구름은 산을 더욱 싱싱하게 만들며
상쾌함의 조각들을 마음 밭에 뿌려줬습니다. 적어도
무너미고개를 향한 마지막 육백미터를 오르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희운각 공기는 후텁지근하고 탁했습니다. 채취 탓이었습니다.
숙면은 사치였습니다. 얕은 잠으로 밤을 지새우고 공룡을 향했습니다.
시계는 아침 여섯시 이십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는 가파름은 이름의 의미를 새기게 했습니다.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이어지는 내리막은
공룡의 엉덩이라도 된 듯 가파르게 붙어 있었습니다.
끝부분 사백미터는 저에겐 사천미터의 거리였습니다.
네발걸음으로 매표소에 이르기까지는 스물여덟 시간이 걸렸습니다.

첫날 팔천오백미터, 이튿날 일만이천오백미터 투지의 행진!
공룡능선에서 대청, 중청, 소청봉을 바라보았습니다.
발아래 펼쳐진 구름과 산이 뒤엉킨 오묘한 광경도 보았습니다.
구름 사이로 내려온 햇빛에 드러난 설악은 신선하고 해맑았습니다.

저는 이런 환상적인 기억과 함께
가슴 속 깊은 곳에 감사를 묻은 채 설악산을 정리했습니다.
저의 두 어깨에 얹히고 다리에 매인 시간의 무게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정리 입니다.

(20180920. srKim)